고전의 향연 - 옛 선비들의 블로그 열여덟번째 이저우기 '월사집'

한국고전번역원

내일을 여는 신문 | 입력 : 2018/10/24 [11:58]

 

고전의 향연 - 옛 선비들의 블로그
⑱이정귀 ‘월사집’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 1564~1635)는 탁월한 문장가요 중국어에도 능통한 최고의 외교관으로서 임진왜란ㆍ병자호란, 명(明)ㆍ청(淸) 교체기를 거치는 동안 격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복잡다단한 외교 문제를 도맡아 해결하다시피 하였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던 노인(魯認)이란 사람이 바다에 표류하여 중국 소주(蘇州)ㆍ항주(杭州) 지역에 이르렀는데, 그 지역 선비들이 모두 이정귀의 <무술변무주(戊戌辨誣奏)>를 외면서 “조선사람 이정귀의 글이다.” 하였으며, 숭정(崇禎) 을해년(1635)에 동지사(冬至使)로 홍명형(洪命亨)이 중국에 갔더니 광녕(廣寧) 옥전(玉田)의 선비가 역시 이 <무술변무주>를 베낀 것을 가지고 와서 이정귀의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무술변무주>는 당시 중국 사람들도 인정한 명문장이었던 셈이다.

   

#중국에서도 문명(文名)을 떨친 최고의 외교관

"조(祖)ㆍ종(宗)이란 칭호를 사용하는 문제로 말하자면, 소방(小邦)은 해외의 먼 나라로서 삼국시대 이래 예의(禮義)의 명호는 중국의 것을 모방하여 서로 비슷한 것이 많았습니다. 우리 선신(先臣) 강헌왕(康獻王)에 이르러서는 무릇 분수에 넘치는 것들을 일절 고치고 바로잡아 미세한 절목에 이르기까지 모두 신중을 기함으로써 상하의 분한(分限)을 분명히 밝히고 이를 자손에게 전하여 금석처럼 굳게 지켜왔습니다. 그러나 유독 칭호만은 신라ㆍ고려 때부터 이러한 잘못이 있어왔는데 신민(新民)들이 잘못된 옛 습속을 그대로 이어받아 외람되이 존칭(尊稱)을 계속 사용하면서 고칠 줄 몰랐던 것입니다."

 

이 글은 월사(月沙) 이정귀가 35세 때인 무술년(1598) 선조 31년에 지은 <무술변무주>의 일부이다. 임진왜란 때 명(明)나라 사람 정응태(丁應泰)가 찬획주사(贊畫主事)로 조선에 들어왔다가 터무니없는 사실을 날조하여 조선을 무함(誣陷)하였다. 그는 조선이 명나라를 치기 위해 일본과 내통하여 일본 군대를 끌어들였으니, 조선이 참람되게 천자의 묘호(廟號)인 조(祖)ㆍ종(宗)을 사용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경기도 가평군 상면 태봉리에 있는 이정귀의 묘소와 묘비. 경기도 지방문화재 79호.

 

 

조선은 건국과 함께 천자의 칭호인 조ㆍ종을 사용하여 원나라에 복속되면서 잃었던 천자국의 자존심을 다시 세웠던 것인데, 이 일로 명나라는 조선을 위협하면서 조ㆍ종의 호칭을 시정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당시 임진왜란이라는 참혹한 전란의 와중이었고 명나라는 막대한 국력을 쏟아 부어 조선을 구원하였기 때문에 그만큼 입김이 셀 수밖에 없었다. 이 때 나라를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건지고 나라의 자존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데는 이정귀의 <무술변무주>의 힘이 컸다. 이 일로 말미암아 이정귀는 국내에서 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문명(文名)을 떨쳤다.

 

1618년 명나라가 후금(後金)과 전쟁할 때 조선이 원군으로 파견했던 강홍립(姜弘立)의 군대가 전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적군에 투항하자, 명나라는 조선이 후금과 내통하고 있다고 의심하여 심지어 <조선을 감호(監護)하자>는 주장까지 나왔다. 감호란 감독하여 속국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이를 예전의 정응태 무고 사건보다 더 큰 변고라 여긴 조선은 1620년에 다시 이정귀를 진주상사(陳奏上使)로 북경에 보냈고, 이정귀는 역시 탁월한 외교 수완을 발휘하여 사태를 잘 무마하였다. 이정귀가 북경에 있을 때 왕휘(汪煇) 등 많은 중국 선비들이 찾아와 지은 시문(詩文)을 보여 달라고 간곡히 청하기에 사행(使行) 중에 지은 시들을 <조천기행록(朝天紀行錄)>이란 제목으로 묶어서 주었다. 이에 왕휘가 서문을 붙여 한 권으로 간행하고 섭세현(葉世賢)이란 사람이 운남(雲南) 지방으로 가면서 그 판본을 가져갔다. 왕휘는 서문에서 중국 문장의 대가(大家)들인 후한(後漢)의 조식(曹植)ㆍ유정(劉楨), 당나라 이백(李白)ㆍ두보(杜甫)보다 낫다고 극찬하였다.

 


▲월사 이정귀의 필적

 

 

#조선중기 한문사대가의 한 사람

월상계택(月象谿澤)으로 일컬어지는 조선중기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문호 이정귀는 세조 때의 명신 이석형(李石亨, 1415~1477)의 현손으로 1564년 10월 8일 서울 청파리(靑坡里)에서 태어났다. 27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9품인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로 관료 생활을 시작하였으니, 처음부터 외교문서를 담당하는 전문 관료로 출발한 것이다. 이로부터 이정귀로 46여 년 동안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특히 아홉 번 예조판서를 역임하고 두 번 대제학이 되어 문형(文衡)을 잡았다. 장유(張維)는 <월사집서(月沙集序)>에서 “고금의 문인을 통틀어서 공만큼 재능을 인정받은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라 하였다.

 

 

#격변의 시대를 살며

이정귀는 선조, 광해군, 인조 세 임금의 조정에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그야말로 격동의 시대를 살았다. 광해군 때는 전란은 없었지만 1613년에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났다. 계축옥사는 역옥(逆獄)으로,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이 선왕(先王)인 선조의 유교(遺敎)를 받든 대신들과 함께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추대하기로 했다는 것이 그 죄목이었다. 그 신문 과정에서 이정귀도 연루되었으나 명ㆍ청 교체기에 탁월한 외교관이 필요했던 광해군의 옹호를 받아 무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1617년에는 인목대비를 폐서인(廢庶人)하자는 폐모론이 일어났다. 이 때 이정귀는 병을 칭탁하여 조정 회의에 불참하며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위험한 처지에 빠졌다.

 

백발의 몸으로 다시 만나니 /白髮重相見
여생은 모두 성은으로 얻은 것 /餘生各聖恩
우리들 앞엔 오직 죽음이 있을 뿐 /吾儕唯有死
세상사는 말하고 싶지 않구려 /世事欲無言
물이 드넓으니 교룡이 숨고 /水闊蛟龍蟄
겨울이 따스해 기러기 놀란다 /冬暄鴈鶩喧
석양에 몇 줄기 눈물 흘리며 /斜陽數行淚
목릉촌에 말을 세우노라 /立馬穆陵村

 

이정귀가 술을 가지고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을 찾아가 작별하며 지은 시로 당시의 위태한 정황과 결연한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석양에 몇 줄기 눈물 흘리며 목릉촌에 말을 세우노라”라는 두 구절은 특히 널리 인구에 회자되었다. 목릉(穆陵)은 선조(宣祖)의 능이니, 목릉촌은 선조의 능이 보이는 마을이다.

 

■월사집(月沙集)

 

임진왜란 이전에 지은 시문(詩文)은 분실되었지만, 이정귀의 『월사집』은 원집(原集) 68권(부록 5권 포함), 별집(別集) 7권, 도합 75권의 방대한 분량으로 거의 모든 문체들을 망라하여 장관을 이룬다.

이정귀는 중국에서 사신들이 올 때마다 접반(接伴)하였으며, 세 차례나 사신으로 중국에 다녀왔으므로 시와 산문 모두 사행(使行) 중에 지은 것들이 볼 만하다.

 


▲'월사집' 7책 표지.

 

시는 <조천록(朝天錄)>ㆍ<빈접록(儐接錄)>과 같은 제목으로 묶여 있는 것들이 많은데 모두 일종의 기행록이다. 산문 기행록 중에 <경신조천기사(庚申朝天紀事)>는 당시의 생생한 외교 현장과 함께 중국 황제 신종(神宗)이 서거하고 광종(光宗)이 즉위할 때 중국 조정의 모습을 잘 그려 보여 준다. 이 밖에 요령성(遼寧省)에 있는 천산과 의무려산, 산해관(山海關)에 있는 각산사를 답사하고 지은 <유천산기(遊千山記)>ㆍ<유각산사기(遊角山寺記)>ㆍ<유의무려산기(遊醫巫閭山記)>는 특히 볼 만하며, 후대 연행록(燕行錄)에 끼친 영향이 크다. 모두 오늘날 중국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미리 읽어둠직한 글들이다.

 

이 밖에 시집인 <폐축록(廢逐錄)>ㆍ<권응록(倦應錄)>에서는 윤근수(尹根壽), 신흠(申欽), 장유(張維), 권필(權韠), 김상헌(金尙憲)을 등 당대 최고의 문사들과 주고받은 수준 높은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글쓴이이상하
한국고전번역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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