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이 숙제는 고사리를 먹지 않았다

한국고전번역원

내일을여는신문 | 입력 : 2019/08/14 [08:19]

                                 백이 숙제는 고사리를 먹지 않았다

   
번역문

    미(薇)는 야생 완두콩이다. 좌수(坐水)라고도 한다. 도랑 옆에서 자라는 덩굴 식물이기 때문이다. 대소채(大巢菜)라고도 하는데, 소소채(小巢菜 새완두)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소소채는 교요(翹搖)라고도 하며, 합환목(合歡木 자귀나무)과 비슷하지만 몹시 작다. 지금의 ‘자괴밥’이다. 대소채는 완두와 비슷하다. 잎은 길쭉하고 둥글며 줄기는 조금 모가 났고, 꽃은 자주색이며 열매는 가늘다. 『본초강목』에서는 열매가 없다고 했는데 그 그림을 보면 열매가 작으니, 열매가 없다고 한 것은 열매가 많은 완두콩과 비교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그 줄기와 잎은 채소국을 만들 수 있고, 열매도 곡식을 대신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백이와 숙제가 캐어 먹은 것이다.

  공영달(孔穎達)의 소(疏)에서는 육기(陸璣)에 근거하여 풀이하였는데, 이것이 옳다. 주자(朱子)는 호씨(胡氏)를 따라서 미궐(微蕨)이라고 의심하였는데, 미궐은 지금의 자궐(紫蕨 고사리)이다. 『사기(史記)』를 말하는 자는 마침내 백이 숙제가 고사리를 먹었다고 여겼다. 

  자서(字書)에 “미(薇)는 궐(蕨)과 비슷한데 가시가 있고 맛이 쓰다. 백이와 숙제가 먹고서 3년 동안 안색이 변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고사리는 연한 줄기 식물이니 어떻게 오래 먹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상(商)나라가 멸망한 시기는 몹시 추운 날씨였다. 우리나라 풍속에 사신이 늘상 마른 고사리를 싸 가지고 가다가 청성묘(淸聖廟) 아래를 지나면 삶아서 반찬으로 삼으니, 더욱 우스운 일이다.

원문

薇卽豌豆之野生者也. 亦名坐水, 以其蔓生溝渠傍也. 亦名大巢菜, 以其似小巢菜也. 小巢, 一名翹搖, 形肖合歡木而至小, 卽今之괴밥. 大巢, 略肖豌豆, 葉橢圓, 莖微稜, 花紫, 實細. 本草無實, 而其圖亦作短莢, 知其謂無實者, 比之豌豆之多實故爾. 其莖葉可作蔬羹, 實亦充穀食, 故夷齊采而食之. 孔疏據陸璣解之, 是矣. 朱子因胡氏, 疑其爲微蕨, 微蕨卽今之紫蕨也. 說史記者, 遂謂夷齊食蕨鼈, 字書則云, 薇似蕨, 有芒味苦. 夷齊食之, 三年顔色不變, 夫蕨屬柔莖, 安可耐久服, 況亡商在大寒之候乎? 東俗, 貢使每齎乾蕨, 及過淸聖廟下, 煮以下飯, 尤爲笑資矣.

-유희(柳僖, 1773~1837), 『시물명고(詩物名考)』

   
해설

   주나라 무왕이 상나라를 정벌하자 천하가 주나라를 받들었다. 상나라 정벌에 반대하던 백이와 숙제는 의리상 주나라의 곡식을 먹을 수 없다며 수양산에 은거하여 고사리[薇]를 캐어 먹다가 굶어죽었다. 『사기』 「백이열전」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다. 이로 인해 백이와 숙제, 그리고 고사리는 절의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조선 후기 박물학자 유희는 『사기』에 기록된 ‘미(薇)’의 실체를 파고들었다. 이시진의 『본초강목』, 공영달의 『모시정의』, 육기의 『모시초목조수충어소』, 주희의 『시집전』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결과, ‘미’는 고사리가 아니라 들완두라는 결론을 내렸다. 방증도 제시했다. 산에 숨어 사는데 먹을 것이 없으면 풀보다는 열매 종류부터 찾아먹는 게 순서다. 백이 숙제가 은거한 지 3년이 지나도록 멀쩡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풀만 먹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은나라가 멸망한 때는 한겨울이니, 산속에 고사리 따위는 없었다는 게 유희의 주장이다.

 

   백이 숙제가 먹은 풀이 고사리가 아니라는 유희의 주장은 신선하다. 대부분의 조선 문인들은 ‘미(薇)’를 고사리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는 순전히 주자 탓이다. 주자는 『시집전』에서 “미는 궐(蕨 고사리)과 비슷한데 조금 크고 가시가 있으며 맛이 쓰다.[薇似蕨而差大, 有芒而味苦]”라고 풀이했다. 주자의 풀이는 호인(胡寅, 1098~1156)의 해석을 따른 것인데, 『시집전』은 『시경』 이해의 필수 텍스트였으니 ‘미’가 고사리로 굳어진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러한 믿음에 바탕하여 조선 사신들은 중국 영평(永平)에 있는 백이와 숙제의 사당 청성묘를 지날 때면 고사리로 국을 끓여먹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여러 연행록에서 확인되는 사실이다. 한번은 고사리를 챙겨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매를 맞은 음식 담당 하인이 백이 숙제를 원망하며 말했다. “죽으려면 그냥 죽을 것이지 하필 고사리를 캐 먹어서 내가 매를 맞게 만드나.”

 

   조선 후기에 접어들어 고증적 학문 태도가 유행하면서 굳어진 해석에 의문을 품은 사람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薇)’가 고사리가 아니라는 주장은 유희만의 견해가 아니다. 이미 1613년 간행된 『시경언해』에서는 면마과에 속하는 ‘회초미’로 풀이했고, 『재물보』와 『광재물보』에서는 유희와 마찬가지로 들완두로 풀이했다. 각종 농서(農書)와 의서(醫書)를 보아도 조선 문인들이 ‘미(薇)=고사리’라는 오류를 무작정 답습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들을 바보 취급하면 곤란하다.

 

   그렇다고 문헌에 등장하는 모든 ‘미(薇)’를 들완두로 간주할 수도 없다. 물명(物名)은 시대마다, 지역마다, 사람마다 달리 사용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물명이 서로 다른 사물을 가리키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이러한 현실이 ‘물명고(物名攷)’라는 저술을 낳았다. 한자 물명을 한글로 풀이한 물명고는 문헌에 나타나는 물명과 실제 사물과의 간격을 해소하려는 노력의 산물이었다.

 

    중국과 일본의 문헌을 볼 때는 더욱 주의해야 한다. 역관 조수삼(趙秀三, 1762~1849)이 중국에 가면서 후박(厚朴)이라는 약재를 십여 바리나 싣고 갔다. 책문(柵門)을 통과하자마자 중국 상인을 만나 흥정하니 값을 몇 배로 쳐주기로 했다. 하지만 조수삼이 가져온 후박을 본 중국 상인은 말을 바꾸었다. 

 “이건 무슨 나무 껍질인가? 후박이 아니다.” 

 조수삼은 굴하지 않고 북경까지 후박을 가져갔다. 북경 상인들이 웃으며 말했다.  

 “이게 무슨 물건이길래 여기까지 가져왔소?” 

조수삼이 후박이라고 하자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가버렸다. 누군가가 진짜 후박을 가져왔다. 

“이것이 후박이오.”

 

 

   중국의 후박은 자작나무 껍질처럼 얇고 매운 맛과 향이 나는 것이 계피에 가까웠다. 조선의 후박과는 판이했다. 조수삼은 힘들여 북경까지 가져간 후박을 전부 내다버렸다. 원가에 운송비까지 합치면 손해가 막심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나오는 이야기다. 중국과 조선의 물명이 서로 달라 빚어진 에피소드다.

 

   고사리를 삶아먹던 들완두를 삶아먹던 상관없지만, 약재의 명칭을 잘못 풀이하여 엉뚱한 약재를 사용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사람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일이다. 의학서에 실려 있는 수많은 약재의 실체를 일일이 검토하지 않으면 이런 일은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다.

 

   고문헌에 실려 있는 이른바 ‘전통 지식’을 이용하려면 물명이 지칭하는 사물의 정확한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다. 한국한의학연구원, 국립생물자원관 등이 이러한 작업을 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고문헌을 전문적으로 연구, 번역하는 이들은 관심이 부족해 보인다. 고전의 현대화는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갈 길이 멀다.

 

 

글쓴이장유승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주요 저·역서
  • 『현고기』, 수원화성박물관, 2016
  • 『일일공부』, 민음사, 2014
  • 『동아시아의 문헌교류 - 16~18세기 한중일 서적의 전파와 수용』, 소명출판, 2014(공저)
  • 『쓰레기 고서들의 반란』, 글항아리, 2013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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