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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서적의 훼판(毁板)과 화서(火書) - 양기정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조여일 | 입력 : 2026/09/16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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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서적의 훼판(毁板)과 화서(火書) - 《예기유편(禮記類編)》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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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기록의 나라였다. 국가의 역사와 정책에서부터 개인의 학문과 일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기록이 생산되었고, 기록은 필사와 간행이라는 방법을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유통되었다. 그 과정에서 주목되는 현상이 책판을 부수는 행위인 ‘훼판’과 책을 불사르는 행위인 ‘화서’이다. 조선 시대에는 정치적, 사상적 갈등으로 인해 특정 서적이 훼판되거나 화서되는 사례가 종종 확인된다.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점필재집(佔畢齋集)》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실려 있다는 이유로 무오사화가 한창이던 1498년에 훼판과 화서를 당했으며, 윤선거(尹宣擧, 1610~1669)의 《노서유고(魯西遺稿)》는 효종(孝宗)을 무함한 글이 실려 있다는 노론의 공격을 받아 숙종(肅宗) 때인 1716년에 훼판되었다. 남인의 영수로서 갑술환국 때 유배되었던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의 《갈암집(葛庵集)》은 저자가 사망한 지 100여 년이 지난 1810년경에 간행되었으나, 저자가 여전히 죄적(罪籍)에 올라 있다는 이유로 훼판과 화서를 당하였다.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이 유교 경전을 새롭게 해석한 책인 《사변록(思辨錄)》은 노론으로부터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공격을 받고 1703년에 화서의 명이 내려졌다가 철회되었다. 그밖에 훼판·화서된 책으로 최석정(崔錫鼎, 1646~1715)의 《예기유편》이 주목된다. 이 책은 국가적 차원에서 간행된 경서 연구서였다는 점에서 앞선 사례와 구별되기 때문이다.
최석정은 주화론(主和論)으로 잘 알려진 최명길(崔鳴吉)의 손자로, 우계학파(牛溪學派)의 학풍을 계승하였다. 영의정에 올라 소론을 이끌었던 그는 정치가로서뿐만 아니라 학자로서도 뛰어난 면모를 보였다. 특히 학문에 대한 열정이 남달라 경학을 비롯하여 양명학, 음운학, 천문학, 수학, 자학(字學)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였으며, 그 성과를 여러 저술로도 남겼다.
《예기유편》은 최석정의 학문적 열정이 집약된 저술 가운데 하나로, 《예기》를 새롭게 편차하고 주석을 덧붙인 책이다. 49편(篇) 체제인 《예기》를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를 모방하여 가례(家禮), 방국례(邦國禮), 학례(學禮), 길례(吉禮), 흉례(凶禮), 가례(嘉禮), 빈례(賓禮)의 7부(部)로 재편하고, 별도의 경전으로 통용되던 《대학》과 《중용》을 《예기유편》 체제 속으로 환원했을 뿐만 아니라, 본래 《예기》에 없던 《효경(孝經)》도 새로 편입하였다. 특히 전체 경문의 단락을 내용에 따라 새롭게 재편하였는데, 이는 이전에 없었던 과감한 시도였다.
최석정은 1700년 10월 4일에 열린 경연(經筵)에서 《예기》를 강독할 것을 숙종에게 건의하면서, 자신이 편찬한 《예기유편》을 간행하여 참고서로 쓸 것을 제안하였다. 이에 따라 《예기유편》은 같은 해에 교서관(校書館)에서 무신자(戊申字)로 초간(初刊)되었으며, 1707년에는 영남 감영(嶺南監營)에서 목판으로 중간(重刊)되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예기유편》은 국가적 차원에서 간행과 보급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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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정은 1701년 영의정에 제수된 이후 꾸준히 숙종의 신임을 받으며 소론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다. 정국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절치부심하던 노론은 1709년부터 《예기유편》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최석정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다음의 글은 《예기유편》으로 인해 노론의 공격을 받은 최석정이 변론의 상소를 올리자, 숙종이 1709년 6월에 최석정을 옹호하며 내린 비답(批答)이다.
최석정은 남들보다 뛰어나게 총명하여 비록 일찍이 학문에 전심하지 않고도 십삼경(十三經)에 해박하였고, 제자백가에도 통하여 자못 속유(俗儒)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더욱 예학에 힘을 쏟았는데, 편찬한 예서가 비록 분류하여 뽑아놓은 것에 가까운 책이기는 했지만, 편차가 잘 정돈되어 예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비록 더러 장구(章句)를 나누어 옮기기도 했었지만, 또한 모두 선유들의 서론(緖論)에 따라 한 것이니, 애초에 마음대로 근거도 없이 지은 것은 아니었다. 또한 주자(朱子)에 대해서도 높일 대로 높이고 중시하여 일찍이 말 한 마디도 저촉하여 침해하는 것이 없었으니, 어디에 오나라나 초나라가 왕자(王者)를 칭한 것과 같은 참람한 점이 있는가. 그러나 경연에서 아뢴 한 가지는 끝내 경솔한 일이었다. 만일 이 일을 가지고 분수에 넘치는 외람된 짓이었다고 허물한다면, 그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는가. 다만 최석정이 사류(士流)의 영수로서 바야흐로 임금의 신임을 받아 중용되고 있는 것 때문에 편당(偏黨)을 짓는 사람들이 기필코 이 일을 빙자하여 모함하려고 하여, 마치 기이한 보물이나 얻은 듯이 서로 상소를 올리면서 주자를 호위하는 것으로 자처하고, 곧장 최석정을 이단으로 공격하기를 마치 홍수나 맹수의 재앙이 닥친 것처럼 하고 있다. 식견 있는 사람이 보기에는 선성(先聖)을 호위한다는 핑계로 당동벌이(黨同伐異)하는 짓으로 비쳐진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니, 그 불경스러움이 더욱 큰 것이다.
무릇 학문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보잘것없는 지혜를 믿고서 선유를 업신여기는 것은 진실로 옳지 못한 것이지만, 의심나는 점을 기록하여 진실로 학문에 도움이 되게 하는 것은 또한 선현들도 일찍이 막지 않았던 일이다. 박세당의 《사변록》은 정말 주자의 학설에 조금 배치되는 듯했으니, 세상에 참된 학자가 있다면 진실로 논변하여 물리치더라도 문제될 것이 없었을 것인데, 그 책을 불태우고 그 사람을 처벌하는 지경까지 이르러 마침내 붕당의 논쟁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최석정의 《예기유편》의 경우에는 일체를 주자에 귀착시켰고 애초에 조금도 경전의 내용을 훼손하거나 성현을 업신여기는 의논은 하지 않았었는데, 편당을 짓는 사람들이 장황하게 날조하여 기필코 죄목(罪目)을 만들려고 하였다. 이 두 사람이 거듭 모함을 받아 배척된 뒤로는 학문하는 사람들이 모두 이를 경계로 삼아 다시는 연구하고 변별하는 학문에 뜻을 두지 않게 되었고, 편당을 짓는 무리들 가운데 세상을 속이는 일에 약삭빠른 자들은 으레 주자의 글 중에서 약간의 구절을 취하여 외어대고 과시하며 크게 떠벌릴 거리를 삼았으니, 독서하는 참다운 사람이 세상에 끊어진지 오래되었다.
錫鼎聰明絶人, 雖未嘗專意於問學, 而博極十三經, 傍及諸子, 殆非俗儒所及. 尤用力於禮學, 所編禮書, 雖近類抄, 而撰次整齊, 大有補於禮家. 雖或分移章句, 而亦皆遵依先儒緖論, 初非率意杜撰. 其於朱夫子, 亦極致隆歸重, 未嘗有一言礙逼, 則顧安有吳楚僭王之嫌? 而惟其筵奏一着, 終涉率易, 若以此咎其僭越, 則夫誰曰不可. 而只以錫鼎爲士流領袖, 方彼嚮用, 黨人必欲藉此擠之, 如得奇貨, 章交公車, 自處以衛護朱子, 而直以異端攻錫鼎, 眞若有洪水猛獸之禍. 殊不知自識者觀之, 憑藉先聖, 以濟黨伐, 其不敬尤大矣. 夫學者之挾其小智, 凌駕先儒, 固爲不韙, 而至於箚記疑難, 實有益於問學, 亦先賢之所未嘗禁. 朴世堂《思辨錄》, 誠若少背於朱門, 使世有眞儒, 固不妨辭闢, 而至於火書罪人, 終歸黨論; 若夫錫鼎《類編》, 一切會極於紫陽, 初未嘗髣髴於毁經侮聖之論, 而黨人張皇構捏, 必欲成罪. 自兩人重被齮齕之後, 學者皆以爲戒, 不復加意於思辨之學, 而黨人輩稍黠於欺世者, 輒取朱子書中若干句語, 誦習而眩耀之, 以爲大拍頭胡叫喚之資, 而讀書眞種子絶於世蓋久矣. 《肅宗實錄補闕正誤 肅宗 35年(1709) 6月 3日》
이 비답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최석정과 《예기유편》에 대한 숙종의 태도와 입장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경서와 제자백가에 해박한 최석정이 편찬한 《예기유편》은 주자학을 훼손한 이단적 저술이 아니라, 선유의 학설에 근거하여 예학을 연구한 성과였다. 둘째, 박세당의 《사변록》과 최석정의 《예기유편》은 모두 반대 세력의 모함으로 배척되었으며, 이로 인해 학문적 연구와 자유로운 논변의 풍토가 위축되어 진정한 독서인이 끊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최석정에게 이토록 호의적이고 긍정적이었던 숙종의 태도와 입장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숙종은 1710년 1월에 영의정으로서 약방 도제조를 겸하고 있던 최석정에게 하루아침에 삭탈관작과 문외출송의 명을 내렸다. 표면적으로 내세운 이유는 임금의 간병을 소홀히 했다는 것이었다. 이는 소론과 노론의 대립이 지속되는 가운데 정국의 주도권이 다시 옮겨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조치로 볼 수 있다.
그해 3월 13일에 노론 측 대간(臺諫)들이 최석정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면서 《예기유편》의 폐기를 요구하자, 숙종은 “논한 말이 엄정하니, 어찌 미룰 필요가 있겠는가.”라는 한 마디 말로써 노론의 요구를 전격적으로 수용하였다. 이에 따라 《예기유편》을 폐기하는 조치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승정원일기》 숙종 36년(1710) 3월 22일 기사에 따르면, 당시에 훼판은 벌써 완료되었고, 화서를 위해 각지에 소장되어 있던 《예기유편》을 수집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화서를 담당할 관서가 확정되지 않았고, 책을 수집하는 데에도 오랜 시일이 걸렸다. 7월 초에 이르러 호조(戶曹)의 주관으로 1,045책의 《예기유편》이 화서되었다.
《사변록》의 사문난적 논란에 이어 최석정의 《예기유편》이 훼판과 화서를 당함으로써 조선 후기의 학문적 다양성과 창의적인 사유의 싹이 급격히 시들어갔다. 비판적 검토와 자유로운 학문적 모색이 ‘경전을 훼손하고 성인을 업신여긴다’라는 프레임에 갇혀 탄압받는 동안, 주자학은 교조화되었고 사회는 경직되어 갔다. “독서하는 참다운 사람이 끊어졌다”는 개탄은 역설적이게도 사상의 자유를 억압한 조선 사회가 스스로 초래한 비극적 초상이었으며, 오늘날 우리에게도 권력과 맹신이 학문과 사상을 통제할 때 일어나는 비극을 냉정하게 경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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